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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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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요? 오드리 헵번 어쩌면 그녀, 헵번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한 이름으로 살았다. 헵번스타일을 유행시켰다. 아름다운 영화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파계, 전쟁과 평화... 오드리 헵번 그녀는 1929 5. 4 벨기에서 출생했다. 언제 어디서나 음악소리에 춤을 추기를 좋아해서 최고의 발레리나를 꿈꾸기도 했다. 6세쯤 부모 이혼으로 아버지가 그리워 폭식증에 걸리기도 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 2차 세계대전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오빠 이안이 독일군에 잡혀가자 오빠를 찾기 위해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춤추는 레지스탕스였다. 자금을 마련하려고. 전쟁이 끝나고 16세가 된 헵번은 뮤지컬, 모델, 연극에 관심을 갖다가 첫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진짜 앤공주가 되어 열연했고 전 세계..
이순신보다 오래 살고 있어요. 광화문 광장 지키미 이순신보다 오래 살고 있어요. 이순신은 오늘도 광화문 광장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다. 행여 개미 한 마리라도 넘어오지 않나 하고... 이순신 덕에 우리는 잘살고 있다. 임진년 그 때 이순신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도 해안을 지켰기에 지금 이땅이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범근이 이름을 날리고 이어 박지성, 손흥민이 공을 잘 찰 수 있는 것도 이순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이 살아있기에 이 나라 대한민국은 든든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이순신을 좋아한다. 나도 그의 곧고 지혜로운 정신,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백성을 사랑한 위대한 장수의 삶을 존경한다. 이순신은 명량앞바다에서 13척으로 승리하고 노량 앞바다에서 5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나도 이제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꽤 많이 살..
빌리 브란트!! 브란덴부르크에서 연설, 노르웨이 군인, 1913년 12월 8일독일 북부 뤼베크에서태어난 사생아가 있었다네.이름은 헤르베르트 어네스트 칼 프람17세부터 독일 사민당에 들어갔었네혼돈의 시대가그렇게 만들었던거지. 나치 정권을 피해서노르웨이로 가서 반나치 운동, 노동운동을 했지.스페인 내전에서러시아 공산당 실체를 알게 되고독일 시민권을 빼앗기고 노르웨이 국적을 얻게 되지그때 이름이 빌리 브란트였던 거지. 히틀러가 죽고2차 대전 후독일로 돌아왔지. 시의원이 되고서베를린 시장이 되고외무장관이 되고 서독 총리가 되었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많은 세월이 흐른1970년 12월당시 서독의 총리였던빌리 브란트는 폴란드에 갔었지. 독일을 너무 싫어하는 옆 나라 폴란드로 가서유대인 위령탑 앞에서57세의 빌리 브란트..
나는 심플하고 싶다. 장욱진처럼 나는 심플하고 싶다. 나는 단순하고 싶다. 미니멈 시대에 미니멈 하고 싶다. 그러나 복잡한 머릿속은 간결하지 않고 늘 복잡하게 가득 차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뭔가로 채워져 있다. 뭘까 내 머릿속에는 뭐가 그리도 많이 들어있나?음... 음식, 다이어트, 운동, 일, 경제, 주식, 잠, 자녀, 형제, 일상의 것들이 섞여있다. 그러다 일상과는 다른 요소가 들어오면 머리가 아파온다. 그럴땐 하나를 제쳐두면 될 것인가? 미니멀? 휴 우 나는 심플하다를 외쳤던 장욱진 화백이 떠오른다. 교사,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던 화가로 불러주기를 좋아했던 장욱진은초기의 좀 더 사실적인 화풍들이 더 추상적인 화풍으로 바뀐다.한국적 추상화의 거장이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황금 물결 치..
어린 루이에게... 루이 브라유 루이 브라유 루이여~ 그대는 어찌 그리 호기심 덩어리였어요? 그 어린 나이에 말 장식 만드는 아버지 공방에는 왜 몰래 들어갔어요? 설마 가죽 자르는 도구가 자신을 다치게 할 것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어린 루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루이. 너무 속상했어요. 겨우 세 살. 우리 나이로 네 살에. 어제까지도 잘 보였던 세상이 조금씩 밤의 세상으로 바뀌고 말았지요 그래서 시장에서 불쌍하게 보았던 그 장님이 되고 말았어요 아~ 조심해야 돼요.. 그런데도 루이의 배우고자 하는 열심은 새로 부임한 신부님의 눈에 튀여 파리에 있는 왕립 맹아학교로 들어갔죠 그나마 다행이에요 왕립학교에서 루이는 글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지요^^ 당시 글자가 있었지만 자유롭게 표현할 수는 없고 비상시 군인들 소통수단 정도의 글자였기에 답답..
칸트2 오늘도 칸트가 맴돈다. 오전에 조카아이들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 간다고 했었지만 그만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늦으면 좋은 것이 무엇일까? 피부가 좋아질까 시간의 신 칸트가 생각난다. "제가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갈 때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겠네요" "칸트가 나오는 걸 보니 오후 3:30인가 봐 얼른 시계를 맞추자" 늘 어머니랑 산책을 다니며 자연을 공부하곤 했다. 어머니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 어머니는 이웃을 돌보다가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돌아가셨다. 칸트는 그때 14살이었다. 지금은 장티푸스 정도에 걸려 죽는 일이 거의 없는 정말 좋은 시대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뉴턴의 책을 살 형편이 못되어 서점에 서서 늦도록 읽다가 도둑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교수의 비밀 서재 개방으..
칸트를 생각하며 칸트를 묵상한다. 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실천이성비판이나 이런 고고하고 난해한 철학서를 묵상하는 것은 아니다. 1724에 태어나 80세를 살다간 어느 인생을 돌아보고 싶다. 임마누엘 칸트, 쾨니히스베르크, 가정교사, 옷 바꿔 입은 친구, 사강사 아버지는 말안장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지극히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김나지움에 어렵게 입학하고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교수가 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칸트는 시간’이라는 등식이 생각난다. 칸트는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1분 남았으니 수업을 마치자고 하면 앉으라고 하면서 정확히 50초 후에 마치겠다고 하기도 하고 오후 3:30이 되면 여지없이 운동을 하러 나가기도 해서 칸트가 나오면 동네 사람들이 시간을 예측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시간의 달인 칸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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